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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10> 시린 네샤트의 고민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2005.08.25
조회수3697
\"붉은 하이힐을 신은 이란 소녀에 대한 기억\"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10> 시린 네샤트의 고민 등록일자 : 2005년 08 월 25 일 (목) 11 : 51







시린 네샤트



이 제3회 광주 비엔날레에서 대상을 수상한 것은 시린 네샤트(Shirin Neshat)의 작품이다. 지금은 세계적인 스타로 꼽히는 그녀지만 내가 실제로 작품을 본 것은 이 때가 처음이었다. 그녀의 작품 역시 아이덴티티라는 문제를 다뤘다.



초등학교 교실 정도 크기의 어두운 방에 들어가면 눈앞의 커다란 스크린에는 열댓 명의 검은 옷의 여자들이 새되고 높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뒤를 돌아보니 여자들이 비치는 큰 스크린과 마주보는, 남자들만 비치는 또 하나의 스크린이 있다. 관객인 나는 그 양쪽을 동시에 시야에 담을 수는 없어 고개를 좌우로 바쁘게 움직이게 된다. 1999년 제작의 비디오 설치작품으로 타이틀은 다. 가나자와의 현대 미술관에서 있었던 <시린 네샤트전>의 카탈로그의 기술을 빌려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두 개 중 하나의 스크린은 견고한 요새 속에서 남자들의 군상이 목적이 뚜렷이 정해져 있지 않은데도 지극히 질서 있는 행동을 취하고 있다. 그들은 밀집한 채 이동해 둥글게 둘러앉는다. 마주보는 스크린으로부터 그 광경을 바라보고 있는 여성 군중들은 돌연 중동의 아랍 문화권 특유의 스타일로 축복이나 경고 때 쓰는 발성을 시작한다. 그리고 모니르 라바니프르가 1989년에 쓴 『알 이 가르크』라는 종말론적 소설에서 발췌한 문장을 현대 페르시아 어로 쓴 손바닥을 일제히 펴보인다. (…) 또한 이번에는 남자들이 이와 같은 여자들의 행동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다. 여자들은 북의 리듬이 울려 퍼지는 사막을 가로질러 드디어 바다에 다다른다. 거기서 배를 물가로 밀고가서는 몇 명의 여자들이 앞바다로 저어나간 뒤 그대로 수평선을 향해 간다….



시린 네샤트는 1957년 이란 태생의 여성이다. 16세 때라고 하니 팔레비 왕조가 붕괴하기 수년 전에 미국에 이주했다. 1982년에 캘리포니아대학 버클리 캠퍼스에서 미술학 석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그녀 자신의 말에 의하면 본격적으로 작품을 발표하게 된 것은 1990년 12년 만에 이란에 돌아가 이란혁명 이후의 사회 변화를 목격하는, 믿기 어려운 강렬한 경험을 한 뒤다.



붉은 하이힐





시린 네샤트, <무제>, 2000년 광주 비엔날레 대상 수상. ⓒgwangju-biennale.org







네샤트의 작품을 접하고 곧 한 정경이 되살아 왔다. 너무나 선명해서 잊을 수가 없는.



1980년대 중반경 나는 처음으로 캐나다에 가게 되었다. 당시 온타리오주의 새드버리라는 소도시의 시민단체가 옥중에 있던 형들의 구원활동을 꾸준히 계속하고 있었다. 연락을 해보니 \"토론토 옆인데 버스로 간단히 올 수 있으니까 꼭 오라\"는 답신이 왔다. \"당신은 토론토에서부터 6시간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이 덧붙여져 있었다.



캐나다에의 입국은 관광 목적이라면 일본인은 비자가 필요 없었다.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당시 한국 국적인 나는 비자를 취득해야만 했다. 예약이 완료된 왕복 항공권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서류를 갖추어 캐나다 대사관에서 면접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



도쿄 아오야마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에 가보니 내가 보고 있는 동안에 방글라데시의 청년 두 명의 비자발급이 거부되고 또한 이란인 가족 다섯 명이 발급을 보류당해 풀이 죽어 있었다. 가족에게 말을 걸어보니 이란에서 홍콩을 거쳐 도쿄까지 왔다.



이제부터 친척이 있는 뱅쿠버에 간다고 한다. 어떻게 쓰는지 가르쳐 달라고 보여주는 신청서류를 보니, 일본 내의 주소란에 \"아라카와구마치야 여관 가와모토\"라고 써 있다. 다섯 명의 가족이 서민 동네의 여인숙에서 몸을 맞대고 언제 발급될지 모르는 비자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현대의 디아스포라였다.



막내딸로 보이는 15~16세의 소녀는 베일로 머리를 감싸고 길고 검은 옷으로 몸을 감추고 있었다. 캐나다 대사관 영사부에는 현지의 일본어 신문이 놓여 있었는데, \"온타리오주는 여러분의 투자를 환영합니다\"라는 기사 옆에 \"당신에게 신주쿠구 가부키쵸와 똑같은 밤을 약속합니다\"(가부키쵸는 도쿄의 신주쿠구에 위치한 환락가로 아시아의 여러 지역 출신의 여성들이 일하는 술집, 마사지, 카바레 등이 밀집해 있다 : 역자)라는 맛사지 팔러의 큰 광고가 있었다. 그 광고가 내게는 소녀의 장래에 드리운 암운인 것만 같았다. 그러나 가는 길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든 대해를 떠 온 작은 배가 수평선 저편에 육지의 그림자를 찾는 것처럼 조금이라고 나은 생활이 있을 것 같은 강기슭을 향해 다섯 명의 가족은 떠가는 것이다.



일가가 캐나다 대사관을 나설 때 일순 소녀의 검은 옷자락이 뒤집어지면서 붉은 하이힐이 엿보였다. 거품 경제의 전성기에 들뜬 아오야마의 거리로 검은 옷의 소녀가 사라져갔다. 그것은 신기루였을까. 그때 그 소녀야말로 오늘의 시린 네샤트가 아닐까. 물론 실제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그런 망상을 품는 것이다.



* * *



그런데 토론토에서 새드버리까지의 여행은 비가 내려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는 없었다. 불안한 심경으로 가르쳐준 대로 깜깜한 거리의 버스정류장에 내리니, 시민단체의 여자가 우산을 받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자택에서 한숨 돌리고 가족들과 함께 고교생인 아들의 여자친구라는 소녀를 소개받았다. 수줍음을 타고 말이 없는 소녀였다. 그러나 내가 멀리 일본에서 온 한국 정치범의 가족이라는 말을 듣고 약간 표정이 움직였다. 소녀는 칠레로부터의 망명자의 딸이었다. 칠레가 피노체트의 압정 하에 있으며 캐나다가 칠레 망명자를 다수 받아들이고 있던 무렵이었다.



칠레라는 단어의 울림은 나에게 특별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1973년 9월 11일 아우구스트 피노체트가 이끄는 반란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사회주의로의 평화적 이행을 실천하고 있던 인민연합 정부를 타도했다. 아옌데 대통령은 반란군에 의해 살해되었다.



정권을 탈취한 군사평의회는 계엄령을 포고 인민연합파로 지목된 자들의 철저한 탄압에 나섰다. 수도 산티아고의 스포츠 스타디움이 임시 정치범 수용소가 되었다. 저명한 가수 빅토르 하라는 이 스타디움에 연행되어 기타를 연주하지 못하도록 두 손을 두드려 깨는 폭행을 당한 뒤 총살형에 처해졌다.



쿠데타 1년 후까지 투옥되어 있던 사람의 수는 7만 명, 피노체트 군사정권 하의 망명자 총수는 100만 명 이상에 달하는 것으로 전해진다. 어둠침침한 캐나다의 지방도시에서 만난 말이 없는 소녀는 그 망명자 가족이었던 것이다.



당시 잡지 『세카이(世界)』(1973년 12월호)에 게재된 후지무라신(藤村信) 씨의 파리 통신이 칠레의 고통스런 투쟁을 전하고 있었다. 그 기사를 읽은 파블로 네루다의 시구를 기억하고 있다.



우리는 안식 없는 바다

희망의 벽

한 순간의 그늘에 눈멀지 않고

어떤 고난에도 쓰러지지 않으리



그들이 피노체트의 시대를 살고 있을 때 나는 박정희와 전두환의 시대를 살고 있었다. 저 암흑의 시대에 그들을 격려한 시구는 나의 뇌리에 새겨져 지금도 머물고 있다. 1989년이 되어 마침내 칠레는 17년 만에 민정으로 복귀해 해외 망명자들도 귀환하기 시작했다.



17년에 이르는 망명생활은 사람들의 외형에도, 내면에도 되돌릴 수 없는 변형을 가했음에 틀림없다. 하물며 성장기, 사춘기를 망명지에서 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아이들이나 젊은이들에 있어서야. 그 소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칠레에 돌아갔을까? 아니면 캐나다에 그대로 살고 있을까?



큰 바다로



\"베일은 오랫동안 모순된 의미를 지녀 왔기 때문에 역사적으로 보아 이란 사회의 매우 복잡한 상징입니다. 정치 권력이 여성으로부터 벗겨냈던 시기(레지아 샤의 시대)가 있는가 하면, 이슬람 혁명 후에는 강압적으로 다시 베일을 쓰라는 명령이 내렸습니다. 나의 작품에 우선 베일이 존재하는 것은 그것이 여성의 일상생활의 현실이기 때문인데, 베일은 이란에서는 일상의 기본으로서 그녀들이 착용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것이 아이덴티티에 필수적인 요소가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요컨대 실제적, 감각적이며, 정치적으로 복잡한 것이기도 합니다.\" (<시린 네샤트전 도록>, 2001년 3월)



베일에 관한 질문에 대한 시린 네샤트의 대답이다. 그녀는 이란에서의 종교 정치 체제에 의한 여성 억압을 비판한다. 고국인 이란에 출입국할 때, 언제나 두려움과 긴장을 느낀다고 그녀는 말한다. 원래 이 작품 자체가 이란에서는 촬영될 수 없어 모로코에서 작업했다. 그러나 자신의 작품에서 일면적인 메시지만이 들리는 것을 그녀 자신은 경계한다. 여기서 의도하고 있는 것은 서구 중심적 보편주의의 입장에서의 여성 억압에 대한 항의만은 아닐 것이다.



나는 이전에 다나카 가츠히코의 논의를 빌려 디아스포라에 있어서는 조국(선조의 출신국), 고국(자기가 태어난 나라), 모국(현재 국민으로 속해 있는 나라)의 삼자는 분열해 있으며 그와 같은 분열이야말로 디아스포라적 생의 특징이라고 쓴 적이 있다.



대부분의 다수자는 자신의 선조와 같은 나라에서 태어나 그 나라에 국민으로 속해 있다. 즉 조국, 고국, 모국의 삼자가 일치하고 있으며 그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디아스포라는 그렇지 않다. 조국, 고국, 모국이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삼자의 지배적인 문화관이나 가치관은 많이 상이하고 자주 상극을 이루는 것이다.



재일 조선인들의 선조의 출신지(조국)는 조선 반도, 그것도 지금과 같이 분단되기 전의 조선 반도다. 그러나 재일 2세, 3세가 태어난 장소(고국)는 일본이다. 그들이 국민으로서 속해 있는 나라(모국)는 한국,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들 중의 일부는 조선적이라는 사실상의 무국적 상태에 놓여 있다. 그러나 그들의 고국인 일본은 과거 그들의 조국인 조선을 식민지로 지배했으며 지금도 그 사실을 진심으로는 반성하고 있지 않다. 즉 조국, 고국, 모국의 삼자가 분열해 상극을 이루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란계 아메리카인이라는 존재 상황 또한 조국, 고국, 모국의 상극의 일례일 것이다. 아메리카의 다수파 측에서 보면 이란은 반미 일변도의 망나니 국가다. 거기서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의한 인권탄압이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다. 이란의 다수파 쪽에서 보자면 미국은 세속적인 이익을 위해 세계 제패를 추구하는 타락한 대악마의 나라다.



시린 네샤트는 완전히 상충하는 이 두 가치관을 가진 두 나라 중 하나를 조국, 고국으로 다른 하나를 모국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분열과 상극은 자아의 내면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란에서 태어나 미국에서 성장한 그녀는 자기 내부의 이란에 안주할 수 없으며 그렇다고 미국과 일체화해 이란을 부정할 수도 없다. 거기서 그녀는 자기 자신에게 침투해 있는 서구 중심적인 스테레오 타입을 배제해 이슬람 문화권의 여성상의 진실을 재발견하고자 한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그녀 자신이 태생문화를 거슬러 올라가며 나는 누구인가를 물어, 자기의 내부의 역사를 발견하고, 자기의 아이덴티티를 자기 자신의 손으로 구축하려고 하는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시린 네샤트는 앞에 언급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슬람권의 여성은 오랜 세월에 걸쳐 복종자 내지는 희생자라는 틀 속에만 갇혀 표상되어 왔으나 나는 그녀들이 사실은 강하며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억압적인 상황에 놓여 있으면서도 빠르게 다시 일어서는 탄력성을 갖고 있다고 믿습니다. 그녀들은 남자들이나 서구 세계의 예상을 넘어서는 방법으로 자신을 해방하는 뛰어난 잠재력을 감추고 있습니다.\"



돌로 만든 성벽에 갇혀 있는 남자들을 버리고, 여자들은 차도르를 두른 모습으로 대해로 배를 저어 간다. 그 배가 어떤 강기슭에 닿게 될지는 예측할 수 없다. 마주보는 두 개의 대형스크린과 흑백을 강조하는 색채의 효과 속에 그녀의 작품이 내게 주는 것은, 극단적일 정도의 콘트라스트라는 인상이다.



여성과 남성, 이슬람 세계와 서구 세계, 전근대와 근대, 모던과 포스트모던. 그녀의 작품이 제시하는 것은 극단적인 콘트라스트를 이루는 복수의 문화권으로 갈라진 디아스포라 여성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중층적인 물음인 것이다. 거기에 간단한 대답은 없다. 그것을 간단한 대답에 무리하게 집어넣으려고 하는 것은 또 하나의 폭력이다.



번역 : 김혜신 가쿠슈인대학 강사(미술사) 서경식/도쿄 게이자이대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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