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유리탑의 저자 고영리(조선일보 20041013기사)
작성자 관리자
등록일2004.10.13
조회수3009
\"팔순을 넘긴 내 머릿속은 아직도 여러 생각들로 多忙\" 한 재일교포 2세의 타향살이 80년 고영리, 김영자 혹은 신타쿠 에이코 ▲ 재일교포 2세 작가 고영리 “한반도가 일본의 식민지였던 시대, 일본인 군인과 결혼해 전후 일본인 사회와 재일교포 사이에서 동요하면서 살아온 여성의 내적 갈등은 어떤 것이었을까.” 지난 2000년 8월, 재일교포 2세 작가 고영리(83·필명)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과 평론을 묶은 작품집 ‘유리탑(사상과학사)’를 내놓았을 때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한 일본 아사히 신문 기사는 이런 물음으로 시작한다. 고영리의 동명 작품집은 국내에선 지난해 한국어로 출간됐다. 고영리가 태어났을 때 일본 제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식민지 지배를 시작한지 이미 10년이 지나 있었다. 만 세살 무렵 부모와 함께 일본에 건너간 그는 내선일체화정책, 황민화정책 아래 성장해 소녀가 되고, 일본인과 결혼했다. 이후 그는 한국으로 돌아간 육친과 떨어져 평생 타향살이를 해야했는데, 이는 상황은 그로서도 전혀 생각치도 못했던 것이었다. 이후 태평양 전쟁과 전후 경제 성장기, 냉전 시대를 거쳐 다시 일본이 이라크전에 자위대를 파병하기에 이른 오늘날까지 약 한세기에 걸쳐 일본에서 ‘조선민족’으로 살아온 고영리. 그에게 글쓰기는 자신을 확인하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는 일본어를 통해서야 비로소 자신의 주체성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일본 속과 한국 밖에서 방황하며 그 어느 쪽에서 속하지 못하는 타자(他者)로 살아와야 했던 그는 ‘김영자’란 한국 이름도, ‘신타쿠 에이코’란 일본 이름도 아닌 ‘고영리’란 한국식 필명을 사용해왔다. 최근 일본 정부의 자위대 이라크 파병 강행을 바라보며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는 이미 땅에 떨어졌다는 생각이 든다”는 고영리를 현해탄 건너 이메일로 인터뷰했다. 팔순을 넘긴 고영리와의 인터뷰는 한국어판‘유리탑(이학사)’의 역자 전은이씨의 번역과 역시 예순을 바라보는 그의 외아들 신타쿠 이와오씨의 컴퓨터 작업을 거쳐 어렵게 성사됐다. ◆”쵸센진” ▲ 초등학교 1학년 입학 당시의 모습 “야, 쵸센진! 쵸센 돼지야! 이….” 초등학교 3학년인 내게 함께 놀던 일본인 아이들이 내던지던 이 말은 청천벽력과 같은 것이었다. 나는 긴장으로 떨면서, 그러나 온갖 머리를 짜낸 끝에 그들에게 되돌려주었다. “야, 닛뽄진! 닛뽄 돼지야!이….” 내가 쵸센진이라면 너희들은 모두 닛뽄진이니까 진(人)과 진의 대결이라면 서로 무승부가 아닌가. 어린 마음에 필사적으로 그렇게 의미를 되새기고 있었다. 그리고 은밀히 결심했다. 결코 저 일본인 아이들에게 뒤지지 않을 훌륭한 아이가 되어 보일 거라고. 시험에 통과하는 일만이 지상 과제처럼 여겨졌던 12살. 내가 입학한 야마구치 현의 명문 아사고등여학교 전교생 400여명 가운데 나는 최초이자 한명 밖에 없는 조선인 학생이었다. 어린 아이답게 즐거운 학교생활을 보내긴 했지만 조선인 아이와 함께 놀아서는 안된다고 하는 일본인 부모들도 많았고, 교실에서 무엇인가 물건을 잃어버리면 왠지 내게 의혹의 시선이 쏠리곤 했다. 한편, 집에 돌아오면 조선독립이라는 단어가 때때로 귀에 들려오곤 했다. 이후 도쿄의 카가와 여자영양학원에 진학했지만 1943년 미국의 도쿄 공습이 시작되면서 야마구치현으로 돌아왔다. 당시 여성들의 삶은 현대와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던 탓에, 나 역시 다른 여성들처럼 결혼하여 가정을 꾸렸다.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린 20년” 조국이 해방되자 부모님은 무척 기뻐하며 고향인 부산으로 돌아갔다. 야마구치현의 센자키항에는 승선을 기다리는 많은 조선인들로 북적거렸다. 그러나 일본 패전을 2개월 앞두고 일본인과 결혼한 나는 홀로 일본에 남았다. ▲ 소녀시절인 17세 무렵의 모습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한국에 있는 가족과의 연락마저 두절됐다. 나 역시 전쟁이 끝난 후 정상적인 생활을 되찾기 위한 고통스러운 나날들이 계속됐다. 재회가 찾아온 것은 그로부터 20년 후였다. 1958년 쯤, 남편 친구의 노력으로 내 가족이 어디에 살고 있는지 알게되었다. 편지가 오가게 되었고 그로부터 몇년 뒤 부산의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센자키 항에서 손에 들수 있을 정도의 짐만을 가지고 귀국선에 올랐던 48세의 어머니는 68세가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버린 20년”이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열매를 맺는다면…” 1957년 무렵, 가정주부로서 십수년을 지낸 뒤 글쓰기를 배우는 장으로 동인잡지인 ‘문예수도’와 인연을 맺었다. 그런데 일본 국적을 지닌 재일교포 여성으로 일본사회에서 느껴오던 분리 현상과 함께 재일교포 사회 내에서도 또다시 심리적인 고립감을 맛보아야 했다. 당시 재일교포 작가들은 이미 중앙 문단을 통해 출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고 게다가 여성은 한 사람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가운데 주변부 작가였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숨은 듯 조용하게 작품을 구상하고 써보는 일이었다. 내게 있어 글을 쓴다는 행위는 자신을 확인하는 수단과 같은 것이었다. 1972년에 ‘신일본문학’에 발표한 ‘차별하는 언어란 무엇인가’라는 작품에 대해 호평해주셨던 일본인 여성작가 사다 아나코 선생이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회의에 출석해 나에 대해 보고했다는 사실을 전화로 알려주었다. 그러나 중앙 문단과 대치하는 발상을 가졌던 나는 애초에 ‘문단’과는 인연이 없는 주변부 작가였다. 그다지 많은 글을 쓴 것도 아니어서 자신이 한심스럽다는 생각도 들긴 하지만, 요즘은 내 나름의 작은 결실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는 사람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이다. ▲ 1945년 6월에 올린 결혼식 사진. 일본 전통 신부 머리와 의상을 한 고영리 옆에는 학교에 다니다가 군대로 직행하게 된 남편이 군복을 입고 서있다. ◆노부부의 상흔 기술자 출신 남편은 전후 일본 경제의 도약과 함께 한국을 비롯한 동남아 등지에 합병 회사를 둔 중견기업에서 맹렬하게 일했다. 나는 “일제”에 의해 식민지가 된 나라의 백정이자 피해자이며 남편은 과거 “일제”의 백성. 현재 “일본 민주주의”사회의 일원인데 그 일본이 다시 “일본 주식회사”로 아시아 침략을 하고 있다니! 그러나 남편은 1970년대에 일컬어지던 ‘경제적 식민지주의’라는 용어를 완고하게 부정했다. 전쟁으로 깡그리 불타버린 허허벌판에서 일어선 자신의 삶이 두터운 방패가 되어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았다. 반면, 아들은 1960년대 후반 일본 대학의 학생운동 조직인 전공투(전학공투회의)세대였다. 따라서 우리집 식탁에는 어쩌다 온 가족이 얼굴을 마주하고 둘러 앉으면 금새 험악한 분위기로 바뀌어버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인간의 몸뚱이는 늙어가고, 노부부는 숱한 전쟁을 함께 싸워온 각자의 상흔을 부드러운 이해의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성숙했다. 그러나 일본 사회의 현실은 이전과 그리 달라졌다고 생각되지 않는다. ◆일본에서 길을 잃다 ▲ 결혼 직후인 23세 때 모습 작년 7월 노무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한 첫날 국회에서 통과된 유사법제 3법은 자위대의 이라크 파병을 시야에 둔 긴급과제로 성립된 것이었다. 9·11 테러의 보복을 위해 미국이 전쟁을 시작한 이후 당시 일본 정권이 발 빠르게 지지 성명을 발표하자 당초 일본 내에서는 반대의 의견이 높었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 문제를 교묘하게 이용해 상황을 준전시체제로 몰고간 정권은 국가 안보 논리를 내세워 반대 여론을 잠재우고 파병을 강행했다. 이에앞서 지난 1999년 8월, 나는 이미 “일본의 전후 민주주의”라는 간판이 순식간에 땅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순간을 목격했다. 그 해 여름 일본 국회에서는 “(미군의 후방을 지원하는)가이드라인 관련 법안”, “히노마루, 기미가요-국기, 국가에 대한 법제”, “헌법 개정을 위한 ‘연구회’설립”등의 법안이 제출되어 가결됐다. 불과 50여년 전, 패전 직전까지 참혹하고 고통스러웠던 전쟁 기간 내내 일본의 군·관·민 1억 인구가 환호의 함성을 내지르며 미친듯이 맹진하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나로서는 “피조차 얼어붙을 것 같은” 현대의 이야기였다. ◆타향살이 한반도가 분단된지 반세기가 흐른 지금까지도, 바다 건너 일본에 살고 있는 내게 한반도의 1000만 이산 가족의 탄식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온다. 내 귓가에는 지금도 지구상 어디에선가 계속되고 있는 분쟁의 불길 속에서 삶의 터전과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신음 소리가 그치지 않는다. 나 역시 붕괴된 가족과 ‘타향살이’가 어느덧 삶 자체가 되어버린 사람 중의 한 명이기 때문이다. 비극을 일으킨 그 배후에 대해서 반드시 분석은 필요하며 얼렁뚱땅 태만하게 넘어가는 일을 용납해서는 안된다. 국가가 구분해놓은 수많은 국경선들은 그동안 나약하고 힘없는 수많은 개인들을 얼마나 유린해왔었는가. 국가와 개인을 이어주는 시민사회의 성숙, 국경을 뛰어넘는 민중의 깊은 연대…. 팔순을 넘긴 내 머리 속은 아직도 이런 여러가지 생각들로 다망(多忙)하여 시간이 모자랄 정도다. (김재은 기자 2ruth@chosun.com) ▲ 2000년 8월 3일자 일본 아사히 신문에 실린 고영리 인터뷰 기사 *고영리는 누구? 1922년 부산 출생. 한국이름 김영자(金英子). 재일교포 2세 작가. 1972년 ‘신일본문학’에 발표한 평론 ‘차별받는 언어란 무엇인가’로 문단의 호평을 받고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에 보고된 바 있다. 1970년대 중반에는 일본 최고 문학상인 아쿠타가와상을 수상한 재일교포 작가 이회성 등과 함께 ‘김희로 공판대책위원회’에 참여해 일본사회의 주변적 존재로 표류하는 재일교포 2세의 삶을 재조명하는 문필 활동을 했다. 그 밖에 ‘일본인, 일본 민족의 국가 의식과 특징(1972)’, 단편소설 ‘기로(2000)’, ‘아리랑과 사쿠라(2003)’ 등의 작품이 있다. 지난 2003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그의 작품집 ‘유리탑(이학사·전은이 옮김)이 한국어로 출간됐다.
댓글
×